중요한 것은 증발하지 않는 마음

[A.I.C.E 포럼] 시민사회 분야 — 계단뿌셔클럽 / 이대호 계단뿌셔클럽 공동대표

LAB2050
LAB2050

--

이대호 계단뿌셔클럽 공동대표

“인터넷의 혜택은 그 잠재력을 훼손시키는 독점기업들이 대부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기술이 우리의 가장 높은 이상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화하고 강화시켜주는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활동가, 예술가, 기술자, 시민, 정책입안자, 그리고 모든 조직체가 이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 “PLURALITY: TECHNOLOGY FOR COLLABORATIVE DIVERSITY AND DEMOCRACY” (2022, 오드리 탕, 글렌 웨일)

4월 10일 LAB2050이 개최한 AICE-Forum의 부제는 ‘AI와 시민사회의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서 SCC(계단뿌셔클럽: Stair Crusher Club)는 접근성 정보를 수집할 때 AI를 활용해서 생채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발표했다. 근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AI 활용 방안’뿐만은 아니었다. AI와 같이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감사히도 이 글을 기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못다한 이야기를 쓴다. 디지털 기술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계단뿌셔클럽의 꿈

계단정복지도 입력 화면

먼저 ‘계단뿌셔클럽(SCC: Stair Crusher Club)’과 ‘계단정복지도’를 소개하고 싶다. 계단뿌셔클럽은 이동권 향상을 목표로 삼는 시빅 해킹 프로젝트다. 출입구 사진, 엘리베이터 유무와 같은 ‘계단정보’를 등록하고 조회하는 앱 ‘계단정복지도’를 개발했다. 앱을 만든다고 ‘계단정보’가 알아서 모이지 않는다. 2인 1조로 짝을 지어 2시간 동안 50개 장소의 ‘계단정보’를 수집하는 ‘정복 활동 행사’를 개최한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약 450명의 시민이 10,000여 개 장소를 직접 방문해 ‘계단 정보’를 수집했다.

SCC가 해결하려는 문제는 ‘계단 정보 미리 알 수 없음’이다. 휠체어를 쓰는 공동창업자 박수빈(현 SCC 공동대표)의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 정의다. 휠체어, 유아차 사용자와 같은 이동약자, 그리고 그 가족, 친구들에게는 ‘계단 정보’가 유용하다. 미리 ‘출입구 사진’을 보면 방문 가능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네이버, 카카오, 구글 조차 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계단정보를 많이 모으고 보기 쉽게 공개하면 ‘계단 정보 부재 문제’는 해결된다고 봤다.

계단정복지도 앱에서는 출입구 사진을 촬영한 후 계단이 몇 개인지, 경사로가 있는지 등을 입력하게끔 되어있다. 사진만 찍으면 알아서 계단 개수 등이 입력되도록 하는 데에 AI를 써볼 수 없을까 하는 것이 AICE 포럼 발표 내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네이버, 카카오, 구글 같은 주요 맵 서비스 사업자의 어플리케이션에 우리가 모은 정보가 공개되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팀의 관심은 ‘계단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최대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의 전환

실제로 정보를 모으면서 크게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다. 계단정보를 모으고 등록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깊이 생각하게 됐다. 정보를 수집하는 ‘계단정복’ 활동을 마치고 후기를 공유할 때가 되면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계단이 많은 줄 몰랐는데, 정말 심각하네요. 오늘 이렇게 모은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어요.” 배경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어느새 문제를 인식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실천하기 위해 정복 활동에 가담하고 있음을 끝내 고백한다. 이동권에 관심 있어 오는 사람 비중이 절반 이하인데도 그렇다.

처음에는 앱을 개발하고 정복 활동 행사를 기획하는 ‘운영팀’이 문제 해결의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활동하면서 운영팀의 역할은 ‘도구’를 제공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운영팀이 한 일은 시민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단정복지도, 정복 활동이라는 도구를 만들고, 제공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주인공은 정복 활동에 참여해 계단 정보를 수집하는 멤버들이다. 멤버들이 앱에 계단 정보를 입력하는 그 순간, 마침내 ‘계단 정보 부재’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기 때문이다.

도구’가 만드는 가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해결 욕구’는 많은 경우 그냥 증발한다. 예를 들어 전장연 시위 뉴스를 접하고 ‘이동권 향상이 필요하긴 하지’라고 생각한 직장인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A에게 문제 해결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도적으로 시위를 주도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이동권 단체 활동가가 될 정도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 관심이 줄고 해결하고 싶었던 마음은 소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욕구 수준에 부합하는 문제 해결 행위를 못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시민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다양해지면 마음에 드는 실천을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가령 A가 자려고 누워서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우연히 “계단 정복 활동 같이 안 하실래요?” 묻는 게시글을 보면 참여할 수도 있다.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문제 해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단뿌셔클럽이 없었다면 증발했을 마음들이 낭비되지 않고 문제 해결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과도가 없었다면 안 먹어 썩힐 사과인데, 칼이 있으면 깎아 먹는 사람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중요한 건 따뜻한 마음들이 증발하지 않도록 막는 일이다. 이 마음들이 모이고, 행동의 에너지로 바뀌면 진짜로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글은 대만의 디지털부 장관 오드리 탕과 경제학자 글렌 웨일이 쓴 것이다. 이들은 다원성(Plurality)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글에서 디지털 기술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제시한다.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들 위험이 크지만, 기술을 잘 활용하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방법의 하나는 ‘사회 문제 해결의 도구’를 만드는 일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보호하는 ‘도구’를 제작하도록 만드는 일, 아주 중요하다. 어떻게 촉진할 수 있을까? 아니, 귀하가 시빅해커가 되도록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email: im@daeho.io

--

--

LAB2050
LAB2050

다음세대 정책실험실 Policy Lab for Next Generation